프런트엔드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프런트엔드 개발자의 이직기

White hand가 되다

12월 말, 영하 20도. 2년간 행복했던 스마트스터디에서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다.
한창 송년회 시즌이어서 바쁜 벌꿀이 되어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다만 사람들마다 퇴사의 이유를 물어서 대답하는게 빡셌다. 앞으로 물어볼때마다 커피 1잔!)

사실 다음 회사는 asbubam님의 공개 레주메처럼 공개구직을 해보고 싶었다. 어찌어찌 바라던 되로 되었지만, 막막했다.
가장 우려되었던 것은, ‘과연 내가 원하는 회사를 갈 만한 실력이 있는가?’.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근데 지금 가고 싶은 회사가 없다’.

나는 어떤 회사에 가고 싶을까?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싶을까? 나는 어떤 개발자가 되고 싶은가? 그 전에, 과연 나는 개발자가 되고 싶긴 한걸까?

사실 만들고 싶은 분야가 명확했다. 중학교 때부터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시간관리 방법론’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랑 초시계 스터디 그룹도 만들어보고, 불릿 노트, 뽀모도로, 엑셀 등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았다. 처음 개발한 토이 프로젝트도 ‘Food Todo‘라는 게이미피케이션을 입힌 투두리스트였다. 만들고 싶은 것을 위해 개발을 하고, 부가적으로 디자인과 커뮤니티 활동을 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프런트엔드 개발이 가장 재미있지만, 백엔드와 디자인, 그리고 기획에도 참여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프론트엔드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왕 시간 많은 백수가 된 겸, 다양한 회사에 놀러가 대화를 나누어 내가 정말로 가고 싶은 회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긴 포인트는 다음과 같았다.

  1. 온라인 서비스로 먹고 사는 곳인가: 전 직장이 컨텐츠 회사여서 이번엔 개발한 프로덕트가 중요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2. 사업의 확장성은 어떻게 되는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3. 내 업무의 범위는 어떤가: 프런트엔드 개발을 메인으로 하고, 기획과 디자인에도 열린 마음으로 토론할 수 있는 곳을 가고 싶었다.

일단 블로그 메인 화면에 간단한 이력을 적고, 최상단에 Available for hire상태를 걸어놓고 관심 있는 회사는 메일을 보내달라고 했다. 그렇게 받은 29개의 메일 중, 9개 회사에 티타임 신청을 하였다. 그렇게 과로사 할 것 같은 한달간의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티타임 혹은 알콜타임

티타임에서 깨달은 가장 큰 점은, ‘한국에 가고 싶은 회사가 없다’라 말한 내가 정말 멍충했고 우물 안 개구리었다는 것이다.

직접 찾아가 함께 일할 개발자들과 이야기 나누니, 회사마다의 고유한 매력이 눈에 띄었다. 아래 리스트는 모두 티타임 후 입사하고 싶어졌던 회사들이다.

금융 관련 서비스
개발을 정말 사랑하고 깊숙히 다루는 고수들이 모여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서비스에 대한 CTO님의 확신과 비전이 멋졌다. 티타임 프로세스도 체계적이었다.

포인트 관련 서비스
내가 매우 선망하는 디자이너님이 계시는 회사이다. 함께 일하면 UI디자인에 대한 감각이 많이 성장할 것 같은 기대가 들었다. 파이썬을 정말 잘 쓰는 회사인 것도 좋았다. 페미니즘적으로도 다니기 좋은 회사라는 점도 큰 플러스 포인트였다.

게임회사의 데이터분석 팀
팀 멤버분께서 나를 잘 소개해주셔서 티타임(실은 고기타임) 분위기가 좋았다. 서로의 장점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런트부터 백엔드, 그리고 데이터 분석을 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식품 관련 서비스
회사 이야기 외에도 앞으로의 비전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어서 즐겁고 뜻깊었던 시간이었다. 매출액이 커서 놀랐다. 회사에서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렜다. 회사 이름을 걸고 운영하는 독서모임에 대한 애정과 확신도 큰 차밍포인트였다.

대기업의 스핀오프
전에 뵈었던 좋은 기억의 개발자분이 소개해주셨는데, 4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자’의 시간이 길었음에도 이렇게 재밌었던것은 오랜만이다. 새로운 프로젝트와, 제안해준 롤도 마음에 들었다. 당장 지원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같은 하늘 아래 있으면 조만간 또 볼거라는–말을 들으며 헤어졌다.

크라우드펀딩 서비스
여기도 2시간이 금새 흘렀다. 처음 뵌 대표님과 CTO님도 유쾌&진지가 섞여있어서 즐거운 분들이었는데, 그 외 팀원들도 내가 뒤에서(?)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호감이 상승했다. 서비스도 원래 내가 잘 쓰고 있었고 해결하려는 메세지가 나의 비전과도 통해서 관심이 갔다. 모두가 반말을 쓰는 문화가 재밌었다(정말로 반말)

포털의 머신러닝 조직
머신러닝 플레이그라운드를 만들고, 백엔드-프런트-디자인을 내가 원하는 기술을 써서 만들어도 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내 강점과 취미가 ‘돌아가는 것을 빠르게 프로토타이핑’라는 것이니까. 피부 톤을 머신러닝으로 알아내는 것을 만들고 싶단 마음이 들었다.

글로벌 오픈소스 스타트업
소스콘때 인연으로 알게 된 CTO님이 메일을 보내주셨다(역시 커뮤니티는 짱입니다). 메일을 보고 감동받아 트위터에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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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시작된 배경, 앞으로의 비전, 그리고 내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서로(회사와 나 모두) 얻어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메일이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기술, 연봉, 문화, 재미 면에는 어디에도 뒤지지 않고, 유림님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유림님이 가장 큰 임팩트를 만들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요? 어떤 도전을 하고 싶으신가요?’.

이것저것 메일로 질문했고, 다정하고 디테일한 답변을 주셨다(11개의 메일을 주고받았네). 지원하겠다는 메일을 보내니 CEO님과의 티타임 일정이 잡혔다. 이태원 카페에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팀에 대한 신뢰와 서비스에 대한 확신 가득한 에너지가 느껴쪘다.
무엇보다, 내 다양성을 존중해주었다. 네가 원하면 커뮤니티를 만들어보는 것도 좋다고. 한국을 넘어 미국에서 해도 되고, 혹시 영어가 문제가 된다면 통역과 함께라도 제대로 해보아라.
내가 중점으로 둔 3가지 포인트(온라인 서비스, 확장성, 업무 범위)를 모두 만족하는 유일한 회사였다. 그렇게 마음속의 1지망이 되었다.

면접을 보자

함께 퇴사한 분들이 여기저기 추천해주셔서 면접은 퇴사 직후부터 바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일주일간 세부에 다이빙 자격증을 따고 오느라 면접 프로세스가 조금 길어졌다(표는 예전에 사뒀지만 뜻밖의 퇴사여행이 되었다).

메신저 회사
처음으로 본 기술면접이었다. 벼락치기로 준비했고 생각보다 거기서 많은 질문이 나와서 열심히 대답했다. 8할 이상이 js질문이었다. 끝에 “이 팀은 일본 출장도 종종 가는데 괜찮으신가요?”물어보기도 해서 좀 행복했다. 그리고 결과는 광탈이었다. 흑흑..!

게임회사의 데이터분석 팀
해커랭크로 코딩 테스트를 보았다. 5시간에 3문제를 푸는거였고, 난이도는 코드워즈나 해커랭크 푸는 분들께는 양호한 정도였다. 이후는 기술면접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1시간 일찍 와서 필기시험을 본다는 것이었다. CS관련 문제들이 나왔고, 나는 자연스럽게(?) 반을 백지로 냈다. 면접관으로 2분이 오셨는데 긴장도 풀어주시고 감사했는데 두분 모두 백엔드 개발자셨다. 프론트 질문이 없어 아쉬웠다. 그리고 2번째 광탈을 했다. 이쯤 되니 마음이 쫄리기 시작했다. 나는 과연 가고 싶은 회사에 갈 수 있을까?

포털의 머신러닝 조직
전에 봤던 면접의 감을 살려 1차 기술면접을 보았다. 여기도 js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2차 기술면접 안내가 왔다. 내가 이상하게 봐서 재검증을 해야하나 싶었는데 원래 있는 프로세스라더라. 2차에서는 리액트를 물어볼 것 같아 공식문서를 정독하고 갔다(번역해준 조은님 감사합니다). 이는 오산이었고 내가 대답을 잘 못하는 게 보여서 분하고 아쉬웠다. 끝나고 대답 못했던거 찾아보며 많이 슬퍼했다. 확실히 면접에서 공부가 최고의 효율로 잘 되는 것 같다. 이번 면접을 통해 정말 많이 성장했다. 살짝 반전은 2차 기술면접에 통과해서 임원면접을 보러갔다는 것이다. 20분 정도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합격 메일을 받았다. 신났다.

글로벌 오픈소스 스타트업
이 회사 면접 프로세스의 특이한(?) 포인트는 3가지가 있었다.
1. 전 과정이 영어로 진행된다: 작은 회사지만 5가지 인종이 섞여있고 영어로 일한다
2. 인터뷰 단계가 길다: 폰인터뷰 -> 과제(7일)&폰인터뷰 -> On-site인터뷰
3. 마지막 On-site인터뷰는 6시간이다

의외의 사실은 이 일련의 과정이 즐거웠다는 것이다. 폰 인터뷰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경험한 기술에 대한 질문이었고. 과제는 만드는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매우 즐거운 과정이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코딩하고 디자인하니 기분이 좋았고(약간 오랜만에 운동한 기분) 새벽 4시까지 하곤 했다. 간단한 노트북을 만들었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6시간짜리 On-site인터뷰는 특이하게 내가 혼자 주저리 말하는 시간이 한 번도 없었다. 주고받고 이야기 나누며 함께 코딩했으며, 한 시간씩 로테이션하며 새로운 팀원과 함께 코딩을 해서 나도 회사와 개발문화에 대해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도움되는 자리였다. 아침 10시에 와서 저녁 6시에 끝났다. 함께 점심도 먹었다. 다음 날 합격 메일을 받았다. 앗싸 소리가 나왔다. 한 달간 고생한 게 떠올랐다.

연봉협상

추운 날 퇴사했는데, 계약서에 싸인하러 가는 날에도 한파주의보 문자가 왔다. 추위에 내가 떨리는건지, 연봉협상에 떨리는건지 모르겠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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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난다. 역시 외국계. 스톡옵션이 있어 서비스를 성공시키겠다는 욕심이 물씬 난다. 이것이 페이열정?
연봉협상 후 카페에 와서 치앙마이행 비행기 표를 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사실 치앙마이다. 10일간 디지털노마드 하러 왔다(어제 DAY1 후기를 썼다).

다녀와서 아파치 제플린의 회사, ZEPL로 출근합니다!

힘들었던 순간

생각보다 면접 과정이 길었다. 합격한 두 회사 모두 퇴사하자마자 지원했는데 딱 한 달 걸렸다. 그리고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리는게 힘들었다. 코인 시세 보는것처럼 30분에 한 번씩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재미있는 넷플릭스를 봐도 마음 한 구석이 찝찝하다. 결과 기다릴 땐 보통 3시간도 못 잤다.

그리고 뜻밖의 힘들었던 점은, 가족이 건강보험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어쩌다 보니 모두 백수 기간이 겹쳤는데, 부양가족 3인을 맡던 내가 퇴사해버린것이다. 취직하니 나 엄마 아빠가 모두 행복해했다. 엄마가 그 사이에 알바하느라 고생하셨다.

하루는 술을 너무 마시고 집에 들어와서 뻗은 날이 있었다. 다음 날 엄마가 내 등짝을 후두려패며 어제 Josh에게 연락 계속 오길래 당신께서 유림이 집에 들어왔다 답장하셨다고 했다.  대화 내용을 무방비하게 봤다가 눈물이 급 나왔다.
잘 들어왔다니 다행이라고, 유림이가 요즘 면접 준비로 심적으로 지쳐있어서 그랬나보더라고.
엄마의 답장으로는, 유림이에게 큰 힘이 되어주는거 잘 안다고. 다음에 맥주 사겠다고.

묵묵히 응원해주고 함께해준 가족도 고맙지만, Josh도 정말 정말 고맙다. 문자 그대로 나보다 나를 더 믿어주고, 이력서와 면접 준비에 너무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기 죽지 말라며 맛있는 것을 꾸준히 맥여주었다. 베리 땡큐고 찡하다.

아 맞아 13년도 비레티나 맥북으로 작업하는것도 힘들었다. 정말… 느리고 중간중간 죽는다.

다시, 출근

이직은 내게 생각치 못한 것들을 주었다. 자바스크립트를 다시 깊이 파보는 계기가 되었고, 나 자신이 현재 어떤 것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혼자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도 느꼇다. 회사에 방문할 기회를 준 지인들께도 감사하고, 본인 이야기처럼 내 말을 들어준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퇴사 축하한다며 리얼한 뱀 인형을 준 연수에게도 감사하다.
사실 한 달간 요일 감각 없이 살아왔는데, 다시 출근을 해야한다는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뭐 그래도 어쩌겠어 가장 나가신다

면접 준비에 도움이 ‘정말로’ 되었던 링크

Published by

Yurim Jin

아름다운 웹과 디자인, 장고와 리액트, 그리고 음악과 맥주를 사랑하는 망고장스터

21 thoughts on “프런트엔드 개발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프런트엔드 개발자의 이직기”

  1. 업데이트 안되는 repository가 갑자기 star가 찍혀서 의아했는데… 링크가 걸려있네요! 도움되셔서 다행입니다! FE 쪽 업데이트 좀 해야겠네요! 축하드려요~~

  2. 한번도 오프에서 뵙지는못했지만 올려주시는 소식 감사합니다~~^^ 어디서도 잘 하시겠지만 선릉근처 반경 10km 오시면 연락주세요

    게시글 밑에 고연봉 기술이민 광고가 붙어 조금 웃었습니다 ㅋㅋ

  3. 와.. 유림님 전 이런 이야기를 중국에서 듣고싶었던걸까요 ㅋㅋ 속이 후련하네요
    저같은 쪼렙 개발자(?)에게 현실적인 문체로 경험 주셔서 감사합니다.

  4. 솔직한 글이라 울림이 있었나봅니다. 많은 자극 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5. 항상 많은 울림을 전해주는 Jay님의 글에 감사합니다. 새로 시작한 일이 착 달라붙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6. 저도 프론트엔드 개발자로써 이직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제까지 본 가장 좋은 이직 후기였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7. 안녕하세요? 일을 쉬면서 이직 준비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저도 Zepl 이란 회사에 관심이 많이 생긴 백엔드 주니어 개발자인데 정보를 찾다 이 글까지 보게 됐어요 ㅎㅎ 제가 준비가 되었을 때 괜히 저도 유림님을 만나뵐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생기네요. 응원 하겠습니다!

    1. 맞아요, 다음에도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네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8. 맛깔나는 필체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댓글중에 ‘울림’이라는 표현…딱 입니다.

  9. 안녕하세요! 지나가다 읽게되어서 글 올립니다ㅎ
    너무나 와닿고 적극적인 자세에 감동받았네요!
    저 또한 디자인으로 시작해 개발을 하고 있지만 정말
    유림님의 글에 여러모로 회상이 많아지는 날이네요..ㅎ
    앞으로 자주 놀러올께요ㅎ (참고로 블로그 북마크해놨어요)
    좋은글 자주 올려주세요!ㅎㅎ코로나 조심하시구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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